단군완검이 건국한 고조선의 변천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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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한국사 4대 왜곡 바로잡기

 

책 소개


그들은 왜 독립운동사를 말살하려 했는가?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은 우리 시대 대표적 역사학자 이덕일이 한국 주류 역사학계의 근본적이고도 구조적인 문제점을 살펴보고, 한국사 인식체계에 대한 종합적 검토와 비판을 통해 참된 우리 역사와 올바른 역사관을 제시하고자 한 책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중국 고대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세웠다는 식민통치기구 한사군이 과연 한반도 내에 있었는지 살펴보았고, 서기 3~4세기까지의『삼국사기』초기기록이 김부식이 조작해낸 가짜라는 역사학계의 정설이 옳은가를 검증한다. 또한 율곡 이이의 십만양병설을 조작해내고, 효종의 북벌에 시종일관 발목을 잡은 우암 송시열이 북벌의 화신인 것처럼 서술하고, 실학의 이용후생학파, 곧 중상학파를 노론이 주도한 것처럼 서술하고, 세도정치를 정조의 책임으로 돌린 노론사관의 실체를 밝혀냈다. 마지막으로는 일제강점기 때 과연 독립군의 항일무장투쟁은 존재하지 않았는지, 존재했다면 왜 말살되었는지 조목조목 짚어낸 후 바로잡았다.

 

역사는 결코 사실 그대로만을 말하지 않는다. 무엇을 전해주고자 하느냐에 따라 재구성되는 것이 역사이다. 일제강점기를 통해 우리는 이러한 역사왜곡을 똑똑히 보아 왔다. 이 책은 이처럼 횡횡해오던 의도적인 역사왜곡에 제동을 걸면서 시대와 정신의 맥락 가운데 올바른 역사적 가치를 되찾고자 한다. 잘못 알려진 역사와 그릇된 역사관을 바꾸는 작업은 정체성을 바르게 확립하는데 기초적인 작업이 될 것이다.우리 시대 대표적 역사학자 이덕일의 한국사 4대 왜곡 바로잡기!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은 크게 네 가지 주제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는 고조선과 한사군 문제다. 고조선과 한사군의 강역문제가 중심이 된다.

둘째는『삼국사기』초기기록 불신론이다.『삼국사기』초기기록 불신론을 처음 제창한 인물은 일제 식민사학자인 쓰다 소우키치인데 그의 이론은 놀랍게도 지금까지 한 번도 근본적인 검토의 대상이 되지 않고 부분적 수정만 거친 채 한국 사학계의 주류 이론이 되었다.

셋째는 조선 후기사를 노론사관에 의해 서술하는 문제다. 율곡 이이의 십만양병설을 조작해내고, 효종의 북벌에 시종일관 발목을 잡은 송시열이 북벌의 화신인 것처럼 서술하고, 실학의 이용후생학파, 곧 중상학파를 노론이 주도한 것처럼 서술하고, 세도정치를 정조의 책임으로 돌 기술들의 실체를 살펴보고 과연 그것이 옳은가를 검증했다.

넷째는 독립운동사를 말살한 부분이다. 한국 주류 역사학계는 "역사학자는 현대사를 연구하면 안 된다"는 기상천외한 논리로 독립군의 항일 무장투쟁사를 말살시켰다. 과연 독립군의 항일무장투쟁은 존재하지 않았는지, 존재했다면 왜 말살되었는지 조목조목 짚어냈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문제들은 하루 빨리 우리 사회의 담론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그간 한국 사회에서는 현상의 문제에 집착한 반면 현상을 발생시키는 본질은 상대적으로 무시되어왔다.『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은 바로 그런 본질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21세기를 살아가야 할 우리의 2세들이 앞으로도 식민사관과 노론사관으로 왜곡된 역사를 교육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중국의 동북공정을 포함하는 식민사관은 침략사관이고 노론사관은 상대에게 닫힌 폐쇄사관으로 두 사관이 가진 침략적, 폐쇄적 성격은 현재 동북아의 화해와 평화 체제 구축에도 큰 장애가 되고 있다. 대한민국이 동북아의 진정한 평화 체제 구축의 선구가 되려면 그 시발점은 일제 식민사관과 노론사관의 극복에 두는 것이 옳다.

 


한사군은 한반도 내에 존재했는가?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세웠다는 식민통치기구 한사군. 고조선과 한나라 간의 전쟁은 한 무제가 사신 섭하涉何를 보내 회유했으나 고조선의 우거왕이 거부한 데서 비롯되었다. 아무 소득 없이 돌아갈 수 없던 섭하는 두 나라 사이의 국경인 패수에서 자신을 배웅한 고조선의 비왕裨王 장長을 찔러죽이고 한나라로 도주했다. 한 무제는 섭하를 처벌하는 대신 요동 동부도위遼東東部都尉라는 벼슬을 내려 표창했다. 그러자 우거왕은 군사를 일으켜 요동을 공격해 섭하를 죽였고 한 무제는 죄수들을 모아 군대를 조직해 고조선을 공격했던 것이다.

 

그런데 고조선과 한나라의 국경인 패수에 대해 일제 식민사학자인 쓰다 소우키치[津田左右吉]의 주장대로 압록강으로 보거나 이병도의 시각대로 평안북도와 평안남도 사이를 흐르는 청천강이라고 보는 것이 한국 역사학계의 시각이다.

그러나 패수의 위치가 현재의 압록강이나 청천강이라면 고조선과 한나라는 전쟁 자체를 벌이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듯 그간 고조선상은 두 가지 사관에 의해 왜곡되어왔다. 바로 중화사관과 일제 식민사관이다. 이 두 가지 사관으로 가려진 베일을 걷어내야 진정한 고조선상이 드러난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사기』,『수경』,『한서』,『삼국사기』,『삼국지』등 1차 사료는 물론, 한반도에서 출토된 중국계 유적과 유물을 정밀하게 분석해 현재 한국 주류 사학계의 고조선사에 관한 정설이 일제 식민사학과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왜곡되었다는 사실을 밝혀냈으며, 원原 고조선상을 생생하게 복원해냈다.

 

『삼국사기』초기기록은 조작되었는가?

이른바 '『삼국사기』초기기록 불신론'이란 것이 있다.

 

서기 3~4세기까지의『삼국사기』초기기록은 김부식이 조작한 가짜라는 것으로 현재 주류 사학계의 정설이다. 이 이론의 창안자 역시 일제 식민사학자 쓰다 소우키치다.

쓰다 소우키치의 한국 고대사관은 간단하다. 1910년대 남만주철도회사의 위촉을 받아 쓴『조선역사지리』등의 저서에서 쓰다는 고대 한반도 북부에는 낙랑군을 비롯한 한사군이 있었고 한강 남쪽에는 삼한三韓이라고 불린 78개의 소국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고 서술했다. 그래야 한반도 남부에 고대판 조선총독부인 임나일본부를 존속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삼국사기』는 같은 시기 한반도 남부에 삼한이 아니라 신라와 백제라는 강력한 고대 국가가 존재했다고 서술할 뿐 임나일본부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서술하지 않았다. 그래서 쓰다는『삼국사기』초기기록이 조작되었다는 '『삼국사기』초기기록 불신론'을 만들어낸 것이다.『삼국사기』초기기록 불신론과 임나일본부는 동전의 양면 같은 존재임에도 해방 후 한국 주류 역사학계는 임나일본부는 부인하면서도『삼국사기』초기기록 불신론은 그대로 존속시켜 정설로 만들었다. 이렇듯 이 책에서 저자는『삼국사기』초기기록 불신론이 만들어진 배경은 물론 이 이론이 우리나라 현행『국사 교과서』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 조목조목 짚어냈다. 또한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고 있는 국가 연구기관의 실태를 샅샅이 파헤쳤다.

 

노론사관은 어떻게 조선 후기사를 왜곡시켰는가?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에 뿌리를 두고 있는 노론은 장희빈의 왕비 책봉을 계기로 숙종 때 잠시 남인에게 정권을 빼앗기고, 경종의 왕권을 무력화하려다 소론에게 잠시 정권을 빼앗긴 것을 제외하고는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정권을 장악했다. 정조 때 소론과 남인들이 일시 정계에 진출했으나 소수에 지나지 않았고 노론 우위는 계속되었다. 노론의 사상적 배경은 극단적 친명 사대주의와 성리학 유일사상 주의였다. 그들은 대외적으로는 모든 개방을 거부하고, 사회적으로는 신분제의 완화 내지 폐지를 요구하는 사회 흐름에 역행해 신분제를 강고히 했으며 적서차별과 남녀차별을 극대화했다. 주자학과 다르면 같은 유학이라도 사문난적으로 공격했고, 천주교를 비롯한 다른 사상을 극단적으로 억압했으며 사회변화를 거부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 노론의 사관이 조선 후기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율곡 이이가 십만양병설을 주장한 것처럼 조작하고, 효종의 북벌정책에 가장 크게 반대했던 송시열을 북벌의 화신처럼 서술하고, 노론 당론과는 상극일 수밖에 없는 실학의 이용후생학파(중상학파)를 노론이 주도한 것처럼 서술하고, 최근에는 정조독살의 혐의를 받는 노론 벽파가 정조의 우당友黨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모두 조선 후기사를 노론의 시각으로 본 결과물들이다. 이렇듯 한국 주류 역사학계의 고대사 인식체계가 일본 식민사관에 깊게 경도되어 있다면 조선 후기사 인식은 노론사관에 깊게 경도되어 있는 것이다.

 

독립군의 항일 무장투쟁은 존재하지 않았는가? 

한 나라가 숱한 고초 끝에 독립을 쟁취하고 새 정부를 수립하면 그 직후부터 독립운동사 연구가 붐처럼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한국은 1980년대 독립운동사와 사회주의사 연구가 붐처럼 일어나 현대사 연구 금지 원칙을 무력화시키기까지 독립운동사는 소수의 연구자들을 제외하고는 전문적으로 연구되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껏『국사 교과서』는 무장투쟁보다 식민지 체제 내의 애국계몽운동이나 실력양성운동 등을 위주로 서술해왔으며, 무장투쟁사는 마지못해 이름 정도 적어주는 선이었다.

 

예를 들어 현행 고등학교『국사 교과서』에는 1920년대 항일 무장투쟁의 중심 조직인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 등의 삼부에 대한 내용이 거의 실려 있지 않다. 그러나 삼부는 이렇게 축소 서술해야 하는 조직이 아니다. 삼부 중 참의부(대한민국 임시정부 육군 주만참의부) 1924년 결성 당시 5개 중대에 600여 명의 무장병력을 갖춘 행정·군사 조직으로, 일제 기관에서 발표한 것만으로도 교전 78, 주재소 습격 56, 면사무소와 영림서 소각 20개소, 일제 군경 사살 95명의 혁혁한 전과를 올렸으며, 1924년에는 함경도 혜산을 순시하고 압록강을 따라 신의주로 내려오던 조선총독부의 사이토 ...

 

[예스24 제공]


작가 소개

저자 | 이덕일

1961년 충남 아산 출생. 숭실대 사학과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했고 「동북항일군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97년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를 필두로 한국사의 쟁점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대중역사서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우리 역사의 온갖 미스터리를 객관적 사료를 토대로 선명하게 풀어낸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 1~3』『송시열과 그들의 나라』『조선 왕 독살사건』 등의 문제작을 펴내면서 우리시대의 대표적 역사저술가로 자리매김했다.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이덕일의 여인열전』 등 생존 당시 주목 받지 못했던 불운한 천재들이나 역사 속에 안타깝게 묻혀버린 인물을 복원하는 작업을 꾸준히 진행해왔다.

 

이덕일은 객관적 사료에 근거하여 역사의 미스터리와 의문에 대한 문제제기로 새로운 형태의 역사서를 집필해왔다. 역사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이끌어 내는 논쟁적인 주제로 새로운 역사해석의 선두에 서있다.

 

그는 최근 정치사 위주의 역사서술에서 벗어나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통해 제대로 주목 받지 못한 그 시대의 역사적 사건들을 입체적으로 복원하는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풍부하고 정확한 사료에 근거하면서도 흡입력 있는 문체로 대중역사서의 새로운 스타일을 창조한 그는 방송과 신문, 잡지 등 다양한 매체에서 활동하면서 더 많은 독자들을 미지의 역사로 이끌고 있다. 이덕일은 기존의 정사뿐만 아니라 우리가 알지 못했던 야사와 어울려 흥미로운 우리 역사의 숨겨진 이면을 밝혀내어 역사 연구의 성과를 대중에게 알리는데 주력하고 있다. 현재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으로 있다.

 


저서로『운부 1.2.3』『사도세자의 고백』『우리 역사의 수수께끼』12,『당쟁으로 보는 조선 역사』『누가 왕을 죽였는가』『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오국사기』『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고구려는 천자의 제국이었다』『설득과 통합의 리더 류성룡』『조선 최대 갑부 역관』『조선 선비 살해 사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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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 주류 역사학계를 쏘다



한사군의 미스터리

현재 주류 사학계는 일제 식민사학의 구도에 따라 평양 일대를 한사군 낙랑군 지역이라고 비정하지만 일제도 처음부터 그렇게 주장했던 것은 아니다. 조선통감부가 도쿄대 공대의 세키노 다다시(關野貞)에게 평양의 석암동을 비롯한 전축분(벽돌무덤) 조사를 의뢰할 때만 해도고구려 고적조사 사업의 일환이었다. 이런고구려 유적() 낙랑군 유적으로 바뀌게 된 데는 도쿄대 도리이 류조(鳥居龍藏)의 역할이 컸다.


일제, 식민지성 강조하려

한사군을 조선사 시작점으로 조작 

중국 기록 미심쩍은데도

실증사학 미명아래 한국사 정설로


도리이 류조는 만철(滿鐵)의 의뢰로 남만주 일대에서() 낙랑시대 고적조사 사업을 수행했던 인물이다. 남만주 유적조사를 마친 그는 대동강변에서 중국식 기와를 발견했다면서 이 일대를 낙랑군 지역이라고 주장했으나 별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 유적들이 고구려 유적이라는 것은 일종의 상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통감부가 조선총독부로 바뀐 후 도리이 류조가고구려 고적조사 사업한 낙랑시대의 고적조사 사업으로 개칭하자고 제안하면서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훗날 조선사편수회를 주도하는 이마니시 류(今西龍)도 처음에는 평양 일대의 유적을 고구려 유적으로 보았으나 총독부의 방침을 알고는 태도가 달라졌다. 이후 이마니시 류는 가는 곳마다 2000년 전 한나라 시대의 와당과 봉니(封泥)를 발견하고 2000년 전에 세웠으나 그간 아무도 보지 못했던점제현 신사비를 최초로 발견하는신의 손이 되었고 평양 일대는 낙랑군 유적이 되어갔다.   


» 평양에 있는 기자의 묘. 조선의 유학자들은 기자가 조선까지 왔다고 믿고 이를 근거로 조선인과 중국인을 같은 민족이라고 생각했다. 일제는 한국과 중국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한국인을 일본인과 동족으로 만들기 위해 기자를 부인했다.   


 일제, 평양 일대 낙랑군 유적지 규정

그런데 평양지역을 낙랑군의 치소라고 규정해놓고 보니 기자(箕子) 문제가 발생했다. <상서대전(尙書大典)> <사기> 등에 따르면 기자는 은()나라 주왕의 그릇된 정사를 간쟁하다가 투옥된 인물이다. () 무왕이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석방시켜주었으나 기자는 주나라를 인정할 수 없다면서 동쪽으로 망명했다


<한서> ‘지리지은나라의 도가 쇠하자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고 그의 망명 전에 조선이 존재하고 있었다고 전한다. 이는 물론 단군조선일 것이다. 현재 요령성 대릉하 상류 객좌현(喀左縣)에서 기후(箕侯)라는 명문이 발견된 것을 계기로 기자가 이 지역까지 왔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런데 조선의 상당수 유학자들은 기자가 한반도까지 왔다고 믿고 조선과 중국을 같은 민족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이 때문에 조선총독부는 평양 지역에서 출토된 중국계 유물들이 조선과 중국이 같은 민족이라는 관념이 강해지는 계기가 될 것을 염려해야 했다.   


조선총독부는 1916 <조선반도사 편성 요지 및 순서>에서조선반도사의 주안점은첫째 일선인(日鮮人: 일본인과 조선인)이 동족(同族)인 사실을 분명히 할 것…”이라고 규정했는데 이 목적에 장애가 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이마니시 류는 1922기자조선 전설고()’에서 기자는 낙랑의 한()씨가 가문을 빛내기 위해 기자의 후예라고 가탁했을 뿐 조선인들의 조상이 아니라고 부인했다. 현재 한국 사학계 주류가 단군을만들어진 전설이라고 부인하고 기자도 부인하는 것은 이마니시 류가 만든 이런 이론을 무비판적으로 따른 것뿐이다.


‘한사군→임나일본부→조선총독부’   


이마니시 류는 1935년 출간한 <조선사의 길잡이>에서 한국사(조선사)의 시작을 한사군부터라고 서술했다. 한국사의 주요 흐름을한사군임나일본부조선총독부로 연결시켜 일제의 한국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렇게 평양지역은 낙랑군이 설치되었다는 서기전 108년보다 무려 2100여년 후에 일제 식민사학자들에 의해 한사군의 중심지인 낙랑군 지역으로 재탄생되었다. 한국사의 식민지성을 강조해 일제의 식민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해서였다.


해방 후 신생 대한민국은 일제가 만든 이런 역사상에 대한 종합적 검토를 통해 일제 식민사관을 극복하고 새로운 한국사 체계를 만들어야 했다. 그러나 해방 후 수립된 냉전 구도 속에서 일제 식민사학은 실증주의란 미명 아래 한국사 주류 학설로 계속 살아남았다. 그리고 한사군이 한반도 내에 존재했고 낙랑군이 평양 일대에 존재했는지에 대해 이견을 제시하면 재야로 몰아 학계에서 추방하는 것으로 하나뿐인 정설로 만들었다  


»   사마천(왼쪽) · 기자(오른쪽  

그러나 이를 정설로 받아들이기에는 의문점이 너무 많다.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20세기에 만든 후대의 시각이 아니라 한사군이 설치되었다는 서기전 2세기의 당대의 시각으로 바라보면 의문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먼저 <사기>의 저자 사마천(司馬遷)이 여러 의문점을 제공한다. 

<사기>에 따르면 한 무제는 고조선을 정벌하기 위해 좌장군 순체와 누선장군 양복에게 57000명의 대군을 주었다. 두 장군은 1년이 넘는 전쟁 기간 동안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고조선 왕실을 무너뜨리고 귀국했다. 그러자 한 무제는 좌장군 순체는 사형시킨 후 시신을 조리돌리는 기시(棄市)형을 내렸고, 누선장군 양복도 사형선고를 내렸다가 막대한 속전(贖錢)을 바치자 목숨은 살려주되 귀족에서 서인(庶人)으로 강등시켰다. 위산(衛山)은 고조선과 강화협상에 실패했다는 이유로 이미 사형 당했으며, 제남(濟南)태수 공손수(公孫遂)도 마음대로 군사형태를 바꾸었다는 이유로 사형 당했다. 그래서 사마천은태사공(太史公)은 말한다라는 사평(史評)에서양군(兩軍)이 함께 욕을 당하고, 장수로서 열후(列侯)가 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라고 혹평하고 있다. 게다가 기시형을 당한 좌장군 순체는본시 시중(侍中)으로 천자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는 인물이어서 무제가 이 전쟁 결과에 얼마나 분개했는가를 말해주고 있다. 전쟁에 나갔던 장수가 승전하고 돌아오면 제후(諸侯)로 봉하는 것이 관례였지만 고조선과 전쟁에 나섰던 장수들은 제후는커녕 모두 사형 당했다. 숱한 고생 끝에 적국의 수도를 점령하고 그 지역에 식민통치기구를 설치하고 개선한 장수들을 사형시키는 왕조가 존속할 수 있을 것인가 


사마천이 제공하는 의문은 이뿐이 아니다.  

사마천(서기전 135~서기전 90)은 이 전쟁의 목격자였음에도이로써 드디어 조선을 정벌하고 사군(四郡)으로 삼았다라고만 적고 사군의 개별적 이름도 적지 않았다. 먼 옛날의 전쟁도 현지답사를 통해 꼼꼼하게 확인했던 이 역사가는 왜 한사군의 이름도 적어 놓지 않은 것일까?

 한사군의 이름은 조한전쟁이 끝난 200여년 후에 반고(班固)가 편찬한 <한서(漢書)> ‘무제(武帝) 본기에 처음 등장한다. 낙랑·임둔·현도·진번이란 명칭이 이때 나타나는 것이다. 전쟁의 목격자 사마천이 적지 않았던 이름을 200여년 후의 반고는 어떻게 적을 수 있었을까 

반고는 흉노 정벌에 나섰던 두헌(竇憲)을 따라 종군했던 데서 알 수 있듯이 중화(中華)사관이 강한 인물이었다. ​

그런데 <한서>도 의문투성이다. 한사군에 대한 기술들이 서로 모순되는 것이다. <한서> ‘무제본기 4군으로 적었으나지리지현도·낙랑은 무제 때 설치했다 2군으로 적었으며, ‘오행지’(五行志)두 장군이 조선을 정벌하고 삼군을 열었다 3군으로 적었다. 같은 <한서>지만사군’(무제 본기), ‘이군’(지리지), ‘삼군’(오행지)으로 제각기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사기> <한서>같은 고대 역사서가 의문투성이로 기록하고 있는 한사군을 한반도 내에 있었다고 확고하게 각인시킨 세력은 물론 일제 식민사학이었다. 한국사의 시작을 식민지로 만들려는 의도였다. 이를 한국 주류 사학계가 현재까지 정설로 떠받들자 중국은이게 웬 떡이냐하고 동북공정에 그대로 차용해한강 이북은 중국사의 영토였다고 주장하고 있는 상황이다 


중국과 일본은 예부터 역사를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한 전통이 깊은 나라들이다.  

중국은 고대부터 춘추필법이란 미명 아래 사방의 다른 민족들에 대해 의도적으로 비하하는 서술을 해왔다. <한서> ‘위현(韋賢)열전동쪽 조선을 정벌함으로써 흉노(匈奴)의 왼쪽 팔을 끊었다라고 적고 있는데 조선과 흉노의 연관성은 차치하고라도 다른 민족의 이름을오랑캐() ()’이라고 적는 데서 중국인들의 비뚤어진 시각을 알 수 있다.  

 

서기 720년에 편찬된 <일본서기(日本書紀)> 역시 19세기에 나가미 지요(那珂通世)가 시조 신무(神武)의 즉위년이 조작되었다는 참위설(讖緯說)을 주장한 것처럼 역사왜곡에 있어서는 뒤지지 않는 나라였다.  


중화 패권주의 사관의 발로인 중국 동북공정은 20세기 일제 황국(皇國)사관의 21세기 판에 불과한 것이다. 해방 6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의 눈이 아니라 타자의 눈으로 그린 것을 한국사의 시작이라고 가르친다면 후세에게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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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우리는 ‘피라미드’하면 흔히 ‘이집트’를 떠올립니다.
기자에 있는 3개의 피라미드는 이집트 피라미드 중 세계 7대 불가사의라고 말하곤 합니다. 기자에 있는 피라미드는 모두 제4왕조(B.C.2600~2480)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4500여년이 된 셈이죠.

그런데 중국에 있는 피라미드들이 이집트의 피라미드보다 더 오래되었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1947년 3월28일자 뉴욕타임스는 ‘미국조종사의 시안 서남쪽 외딴 산의 거대 피라미드 발견’이란 타이틀로 당의 수도였던 장안지역에서 찍은 피라미드 사진을 실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중국 당국은 피라미드 존재 자체를 부인했습니다. 1994년 3월 독일인 하우스도르프는 북중국의 ‘하얀 피라미드’의 존재를 비밀리에 촬영해 보도했습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이집트의 가장 높은 쿠푸왕 피라미드(146.5m)보다 2배가량 되는 300m가 넘는 것도 있다고 합니다. 고고학자 왕시핑 교수는 서안 일대에 피라미드를 4500년 전에 세워진 것으로 보았습니다. 
 


지난 2001년 중국 신화통신은 중국 고고학자들이 중국북부 내몽골(만주 북서부) 자치지역에서 무려 5000년 전의 피라미드 고분인 건축물을 발견했다고 보도했습니다.

당시 기사는 중국 고고학자 구오다쉰의 말을 빌려 내몽골의 피라미드를 지금부터 5000년 전 홍산문명시대의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내몽골의 피라미드는 이집트의 피라미드보다 적어도 1000년 전에 제작된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중국 당국은 장안지역의 피라미드들에 대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만약 장안지역의 피라미드들이 중국의 피라미드라면, 이집트의 피라미드보다 1000년이나 오래된 것이라고 전 세계에 홍보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연히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신청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중국 당국은 장안지역 피라미드들(사진)에 대해 침묵하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류병학 | 미술평론가> ​


왜 중국은 피라미드를 홍보하지 않는 걸까요?
아마도 제 짐작엔 피라미드를 인정하게 된다면,
자신들이 왜곡한 거짓 역사가 들통나게 되기 때문이겠지요.

우리나라 역사는 중국과 일본에 끊임없이 왜곡되어 왔습니다.
우리나라 역사의 참된 진실을 알아야 그들의  역사 왜곡 만행에
대처할 수 있겠지요?

개벽실제상황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자신의 역사를 알지도 못하는 민족이 중국과 일본의 역사 도적질을 나무랄 수 있는가! 어떤 의미에서는 역사를 훔친 민족보다 지키지 못한 민족이 더 비난받아 마땅하다.

현재가 과거(뿌리)와 단절되어 제 정체성을 상실하였는데 어떻게 밝은 미래를 설계할 수 있겠는가.

추악하게 조작된 역사가 바로잡힐 때, 즉 진실로 '왜곡된 과거의 종말'이 이루어져서 과거를 바르게 보고 제대로 평가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역사를 재구성하는 힘이 생기고 새 역사를 창조할 수 있는 지혜가 열릴 것이다. (1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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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하나로 시작되고 하나로 끝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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