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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도서관 보관 진본규원사화 영인본) 


한국의 상고사(上古史) 및 만설(漫說)을 적은 역사책. 1675(숙종 2) 북애노인(北崖老人)이 지은 책으로, 서문·조판기(肇判紀태시기(太始紀단군기(檀君紀만설(漫說)로 나누어져 있다. <규원>은 저자가 부아악(負兒岳, 북한산) 기슭에 있던 자신의 서재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조판기>와 <태시기>는 일대주신(一大主神) 환인(桓因)이 천지를 열어 창조하고, 환웅천왕(桓雄天王) 신시씨(神市氏)가 태백산에 내려와 선정을 베푸는 과정이 서술되어 있으며, <단군기>에는 환검(桓儉)으로부터 고열가(古列加)까지 47대 왕명과 재위기간 및 각 당대의 치적이 쓰여 있다. <만설>에서는 이 책을 제작할 당시 조선이 만주를 잃고 약소국으로 전락한 것을 탄식하면서, 부강한 나라가 되기 위한 3가지 조건으로 지리(地利인화(人和보성(保性)을 내세웠다. 이 요소들은 각각 잃어버린 만주땅을 되찾고, 당쟁을 버리고 단결하며, 고유문화를 지킴과 동시에 남의 것도 취할 것은 취하자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이 사화제작에 참고로 한 책은 《진역유기(震域遺記)》로, 고려 말 과거에 낙방 후 술사(述史)에 뜻을 둔 청평(淸平) 이명(李茗)이 지은 사서인데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이 책은 고려 초 발해유민이 쓴 《조대기(朝代記)》를 토대로 하였으며, 고사에 있어 《삼국유사(三國遺事)》보다 훨씬 진취적으로 기술되어 있다고 한다. 《규원사화》는 결국 단군시대로부터 내려오는 민족고유신앙인 신교(神敎)의 입장에서 쓰여진 종교적 사화로, 상고사의 사료(史料)로서보다는 한국문화의 저변을 이루어온 민족적 역사인식의 일면을 보여 준다는 점에 그 가치를 지니고 있다. 1 70. 


(규원사화를 쓴 북애선생의 피맺힌 절규)

330년전 규원사화를 쓰신 북애선생께서

그 때 당시 우리 조선의 백성들이

우리 역사와 민족의 정기를 모르고

중국의 논리에 빠져 있는 것을 통탄하고 있는데, 


이는

33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참다운 우리의 역사와 민족의 정기를 모르고

미망에서 헤매고 있는 사람들이 많음을 한스럽게 생각합니다. 


다음은

규원사화 태시기에 나오는 것으로서

북애선생이 세상의 무지함을 한탄하여 쓰신 것입니다. 


余嗤之可惜, 近世學者, 拘於漢籍, 溺於儒術,

惛惛然以外夷自甘, 動稱華夷之說. 


내가 남몰래 냉소하면서도 애석해 하는 것은,

근세의 학자들이 한나라의 서적에 얽매여 유교의 술수에 빠지고 흐리멍텅해져

'바깥 오랑캐(外夷)'라는 말을 스스로 달갑게 받아들여서 


걸핏하면

'화이(華夷)'의 논리를 입에 올리는 일이다. 


余於盛筵, 賓朋齊會, 皆雄談峻論之輩, 余因醉揚臂而呼曰:

"君等皆云華夷, 焉知我非華而中原之爲夷耶!

且夷者, 從大從弓, 東人之稱, 太古我朝鮮, 以武强鳴於世,

故中原之士, 聞風懼之, 夷豈是戎狄之賤名耶 


내가 어느 성대한 잔치 자리에서 손님이며 벗들과 함께 모였는데,

모두 뛰어난 말솜씨로 그럴싸한 말들을 하는 무리들이기에

내가 취기를 빌어 팔뚝을 걷어올리고 탄식하며 이르기를,

"그대들이 모두 '화이(華夷)'를 말하는데,

우리가 어찌 중화가 아닐 것이며

중원이 도리어 오랑캐가 됨을 그대들이 어떻게 알겠는가

또한 '()'라 함은 '크다'는 것과 ''이라는 의미에서 유래하여

동방의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서

오랜 옛적

우리 조선이 무예가 강성하여 세상에 이름을 드날린 때문에

중원의 선비들이 그 풍문을 듣고 두려워하여 그렇게 이름한 것인데

()가 어찌 융()이나 적()과 같은 천한 이름이겠는가?

國自上古, 人皆强勇質直, 雅好禮讓, 中土有'東方君子之國'之稱焉,

我國豈本戎狄之類哉! 鴨水以外, 縱橫萬里之地, 是乃我往聖先民,

艱苦經營之地也, 豈本是漢家物耶! 孔子之世,

周室旣衰, 外族交侵, 厲王敗死於犬戎, 其他北狄 荊蠻 山戎無終之屬, 侵偪不已,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사람들이 모두 굳세고 날래며 품성 또한 강직하고 올바르기에

평소에도 예의와 양보를 좋아하여 중원에는 '동방 군자의 나라'라는 말이 있게 되었는데

우리나라가 어찌 그 근본이 융·적 등의 무리와 같다는 말인가? 

압록강 바깥 사방 1만 리의 땅은

예전에 우리의 성인과 앞선 백성들이 어려움으로 일구어 온 땅인데,

어찌 본시 한나라 놈들의 물건이겠는가

공자의 시대에 주() 왕실이 이미 쇠퇴하여 바깥 민족들이 번갈아 침범하니

여왕이 견융(犬戎)에게 패하여 죽게 되었고,

그 밖에 북융(北戎)이며 형만(荊蠻)과 산융(山戎)

끊임없는 무리들이 침략하여 핍박하길 마지않았었다

我族亦以是時, 威振中土. 故孔子, 慨王政之不敷,

恨列國之交侵, 有志而作《春秋》, 尊華攘夷之說, 於是乎始立.

若使孔子, 生於我邦, 則寧不指中土而謂戎狄之地乎!"

우리민족 또한 이때에 위엄을 중원에 떨쳤었다.

때문에 공자가 왕의 다스림이 널리 미치지 못함을 개탄하고

여러 나라가 번갈아 침범함을 한탄하며 뜻이 있어서《춘추》를 지었기에,

중화를 받들고 오랑캐를 내친다는 말이 이때 비로소 쓰여지게 되었다

만약 공자가 우리나라에서 태어났더라면

오히려 중토를 가리켜 오랑캐의 땅이라고 어찌 말하지 않았겠는가" 하니

滿座冷笑或驚怪, 不小縱有然之者, 竟不快應,

余蹴床而起, 人皆謂淸狂殊甚, 可歎.

모든 사람들이 비웃기도 하고 혹은 놀랍게 생각하기도 하였으며

적지 않게는 사뭇 수긍하는 자도 있었으나

결국에는 모두 쾌히 응하지 않기에 내가 상을 박차고 일어나니,

사람들이 모두 광기가 매우 심하다고 말하였다

통탄할 노릇이다.

이제 조만간 우리 역사의 실체가 드러나서

찬란했던 우리 선조의 광영을 돠찾는 날이 분명히 올 것입니다.

그 것을 준비하고 이루어야 할 사람은

바로 우리들 자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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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설>정종섭 안행부장관이 보는 풍류정신과 범부(凡父) 김정설

<김정설>정종섭 안행부장관이 보는 풍류정신과 범부(凡父) 김정설




범부가 주창한 風流道(풍류도至情(지정道義(도의) 정신

국민대통합·통일 위해 새로운 접목 필요 


대한민국 정신문화가 방향을 찾지 못하고 있다. 특히 세월호 사건을 비롯 급성장하는 경제 속에 국민정서가 정체성을 잃으면서 갈등문화만 양산되고 있는 실정이다. 일각에서는 이를 해소하고 국민 대통합을 이끌어 내기위한 새로운 `국민정신운동` 창조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런 가운데 본지는 대한민국 정부 출범 당시 국가 정신적 틀인 `국민윤리`와 국가 방향타를 제시한 위대한 사상가 범부(凡父) 김정설(鼎卨·이하 범부) 선생의 풍류정신(風流精神)을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재조명<본지 1022일자 10면 보도>한 바 있다. 범부의 풍류정신 속에는 통일(統一), 국민운동(國民運動) 등이 포괄적으로 담겨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특히 현 정부를 비롯 미래정부도 통일이란 큰 틀을 일궈내야 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이와 관련, 본지는 평소 정신문화운동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가져 온 정종섭 안전행정부 장관을 만나 `풍류정신`에 대해 들어봤다.


-풍류(風流), 풍류정신(風流精神)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 장관의 견해는.

△풍류사상은 범부(凡父) 선생이 동서양 학문, 특히 우리 상고사(上古史)를 공부하고, 우리 민족의 원류를 찾아내려고 한 노력의 결과로 제시한 개념이어서 제가 말씀드리기에는 조심스럽습니다.


범부 선생의 우주, 인간, 자연에 대한 사상은 천재적인 두뇌와 동서양 학문을 공부한 후 피력하신 것이어서, 그 스케일의 방대함과 치밀함에 학자들도 놀랄 정도입니다. 아직 제 수준으로는 그자체를 이해하는 것마저 어렵습니다. 한국 지성사 또는 지식사에서 내노라 하는 한용운, 김법린, 최범술, 곽상훈, 황산덕, 이항녕 등 여러 분들도 범부 선생의 영향을 받은 분들이니 더 말할 나위가 없지요.


-평소 풍류정신(風流精神)과 범부 김정설에 대한 연구를 많이 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근현대사에 풍류정신을 주창한 분이 범부 김정설 선생입니다. 구 한말에 태어나 일제 식민지시대에서 해방과 건국시기 그리고 60년대를 관통하며 우리 민족의 사상적, 정신적 원형을 찾아 이를 바탕으로 신생 대한민국의 건국철학(建國哲學)과 정신적 기반을 수립하고자 치열하게 살다간 천재적 사상가(思想家)이자 학자(學者)이며 경세가(經世家)이기도 하지요.   


, 동서양의 철학, 종교, 역사, 정치 등에 관한 무불통지(無不通知)의 지식으로 독립운동(獨立運動)과 민족계몽운동(民族啓蒙運動), 건국운동(建國運動)을 실천한 인물이고, 한국 지성사의 중심적인 인물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김동리(東里) 선생의 큰 형님되시는 분이지요.


-새마을 운동은 풍류정신이 바탕이 됐고, 국민윤리(國民倫理) 교과서도 `풍류정신`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는데 사실인가. 

△박정희 전 대통령이 5·16이후 새 국가건설의 사상적 스승으로 삼은 분이 범부입니다. 범부 선생은 해방 후 중요한 건국시기에 이승만 자유당 정부와 장면 민주당 정부가 건국철학을 제대로 정립하지 못하고 권력투쟁(權力鬪爭)을 일삼고 일제 잔재를 청산하지 못하여 건국기의 혼란을 키워왔다고 강하게 비판하였지요. 5·16 이후 `민족개조(民族改造)` `인간개조(人間改造)`니 하는 주장들도 지성의 경박(輕薄)과 무지의 소산이라고 비판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사상계의 중심인물로 우리 민족이 고대부터 가져 왔던 고유 사상인 풍류도(風流道), 사익을 초월하여 나라와 만백성을 위해 헌신하는 `지정(至情)`정신, 뛰어난 능력을 살려 이를 바탕으로 우리의 정신 원류인 도의(道義)정신을 `국민운동`으로 전개하여 주체적인 국가를 세우자고 역설하였습니다.


특히 민주주의는 민본(民本), 민주(民主), 민권(民權), 민복(民福)이라고 하고, 이는 시대적 가치이며 우리 고유 정신에 이미 들어 있는 것이라고 주창했었지요. 서양의 어설픈 사조(思潮)에 우왕좌왕하지 말고 일제식민지를 거치면서 말살되어간 우리 민족의 오랜 역사속의 영성과 철학과 도의정신을 되살려 이를 건국원리로 하고, 그 한 방법으로 국민교육과 국민운동을 전개하는데, 국민윤리의 정립도 이에 포함되는 것이었습니다


동양과 서양학문을 천재적 능력으로 섭렵한 범부 선생은 일본의 중역에 의한 지식을 멀리 하고 원서를 읽을 것을 지식인들에게 강력하게 주문하고, 해방 후 60년대까지 나라를 혼란에 빠뜨린 공산주의에 대해서는 공산주의이론과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비판하였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50년대와 60년대 초기의 혼란을 바로 잡는일에 공산주의의 척결, 국민윤리의 정립과 교육 그리고 새마을운동을 국민운동으로 전개한 것에서는 범부선생의 `건국사상`과 방략이 일치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현재 국가가 급성장하면서 정신문화가 상실되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 장관 입장에서 `국민운동`으로 `풍류정신`을 도입할 의사가 있나.  


△풍류정신의 도입 이전에 한국은 그 동안 부분적으로 수입한 지식과 사상과 제도가 뒤엉켜 지금까지 온 셈이지요. 

 


우리가 독자적으로 만든 것은 별로 없고. 그나마 한국인의 우수성으로 이런 난맥상을 헤쳐온 것으로 봅니다. 자유민주주의, 자본주의, 시장경제 등도 이제는 제대로 인식하고 우리에게 맞게 `디자인`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물론 모든 지식과 정보가 실시간 공유하는 시대에 우리 것만 찾고 이를 고집하는 것은 어리석지만, 인간성의 회복, 공동체 정신의 회복, 공존 상생, 천인묘합의 삶을 위한 `정신운동`은 필요하다고 봅니다.


()와 비아(非我)의 논의에서 인간과 자연은 `` `비아`의 관계가 아니라 인간과 자연이 곧 아()라고 한 범부선생의 통찰력은 환경보호, 생태주의 등의 서구적 생각을 포함하는 더 큰 자연관이지요. 이에 따르면 우리의 삶의 방식도 지금보다 훨씬 행복한 삶을 살게 되지요.


그리고 국민 대통합과 통일, 새로운 정신문화 창조를 위해서 풍류정신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출처 -

경북매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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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1999.09.28. 09:48)
(서울=연합뉴스) 정 열기자 = KBS-1TV는 대하다큐멘터리 `해방' 방영으로 인해 6주간 방영을 중단했던 「역사스페셜」을 이번 주부터 다시 방송한다.

오는 10 2일 저녁 8시에는 상고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의 우리 역사를 기록한 책 `환단고기(桓檀古記)'를 소개하고 최근 일고 있는 `환단고기 열풍'의 의미를 분석한 `추적! 환단고기 열풍'을 방영한다.


환단고기는 삼성기(.), 단군세기, 북부여기, 태백일사 이렇게 네 종류의 책을 한 권으로 묶은 책이다.

환단고기에서는 우리 역사를 단일민족에 의한 대통일국가로 묘사하고 있으며 우리 민족이 활동했던 무대를 중국과 러시아, 몽고, 서아시아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또 우리 민족은 문자를 최초로 발명했고 중국과 아시아 각국에 문명을 전파한 하늘의 민족이라는, 눈부시게 찬란한 우리 민족의 상고사를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 때문에 환단고기는 일부 재야 학자들에게는 경전으로, 기존 사학계에서는 위서로 평가받고 있으나 최근 일부 지식인들에 의해 추진되고 있는 잃어버린 상고사를 회복하자는 운동과 맞물려 환단고기에 대한 관심이 점점 고조되고 있다.

환단고기 열풍 전파의 주역은 다름아닌 컴퓨터 통신과 인터넷으로 최근 각 통신의 한국사 방은 환단고기 논쟁으로 뜨겁다.

환단고기에 대한 관심은 서점가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며 이를 번역한 책은 이미 10종류 이상 출판됐는가 하면 지금까지 1백만권 이상 팔려 스테디셀러로 자리잡고 있다.

이번 주 「역사스페셜」 시간에는 우리 민족의 역사를 찬란하게 기술하고 있는 환단고기의 내용과 최근 일고 있는 환단고기 열풍, 그리고 이를 사료로서의 가치가 없다고 일축하고 있는 기존 사학계의 입장 등을 심층조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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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에 대해 부정적인 분들이 많은데 적어도 임진왜란을 기준으로 그 이전시기는 참으로 백성에게 좋은 시기였다.

1. 우선 조선시대지리지와 각종기록들은 고려가 하지못한 고구려영토수복을 이루어냈다고 기록한다. 오죽하면 숙종실록에는 조선땅이 고구려땅보다 2배나 넓은데 왜 국력이 고구려보다 못하냐고 탄식하는 기록이 있다.

태조실록에는 태조이성계에 충성맹세한 타타르와 여진계통의 부족이 등장하는데 무려 50개가 넘는다. 그중에는 아직도 몽골서부에 사는 올량합도 있으며 금나라의 주요 체계였던 맹안부족도 여럿있다

자료를 조사해보니 지금 대동시일대가 당시 올량합부족의 땅으로 조선의 영토였다. 실록에는 폭과 넓이가 만리가 넘는다라고 하고 세조때 작성한 동국지도에는 흑수말갈과 거란 안시성 백암성을 그려넣고 전부 조선땅이라고 표기했다  영토에 있어서는 과거 고구려에 별로 뒤지지 않는다.

2. 국력

고려시대기록을 보니 우리의 인재와 문물이 송나라에 뒤지지 않는다라는 기록이 있었다. 물론 조선시대의 인구나 문물로 봐서 명나라에 약간 뒤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전왕조에 비해 조선왕조는 세금체계를 구체적으로 세우고 민원을 중시해서 백성들의 삶이 이전에 비해 나아진 것이 사실이다. 고구려시대에는 귀족들이 고리대금업으로 일반백성을 노비로 만들어 버려 영양태왕이 국가에서 백성에게  돈을 빌려줘야만 했다. 즉 중산층의 몰락이 있었으나 조선시대에는 상업이 발달하고 중산층이 두터웠다.

귀족들의 횡포가 줄었던 것이다이런 것에는 세종대왕의 공로가 지대한 것이 사실이다.

세조시기에 조선군은 43만으로 그중 궁병이 30만이었다. 기병과 보병은 1:2 비율이었다. 일부지방은 기병이 보병과 비슷한 곳도 있다.

고려의 70만대군에 비해 적으나 그 질적인 면은 더 뛰어났다. 명나라사신이 조선대신에게 타타르군이 조선군의 궁병이 무서워 감히 조선땅에 들어오지를 못한다라고 칭찬하는 기록이 존재한다. 50만 타타르군은 명나라수도를 포위하고 황제를 포로로 잡을 정도로 강했지만 조선군에게 위협이 되지 못했다

조선후기에도 조선군의 활쏘는 실력은 대단하여 백발백중이었다. 병자호란때 2명의 장수가 각각 기병수천명과 조총병과궁병수천명을 이끌고 왕을 구하러 남하했는데 기병을 이끌던 장수는 청나라군에 포위되어 전멸했지만 조총병과 궁병을 이끌던 장수는 언덕으로 올라가 진을 친뒤 청나라군을 공격하여 수천명을 죽였다. 명중률이 뛰어나니 제아무리 말을 타고 달려도 명중시켜 죽였던 것이다.

청나라2대황제 홍타이지는 겨우 3만의 기병으로 명나라 방어선을 뚫고 베이징을 포위했다. 조선이 10만의 청나라기병에 방어선이 모두 뚤리고 수도가 함락당했는데 명나라는 겨우 3만의 병사도 못막았다. 그럴수밖에 없는것이 명나라 요동방어군의 기병은 겨우 수천명수준이었다. 조선의 평안도 방어군7만중 기병이 2만명인 것에 비하면 당시의 조선군사력이 명에 비해 그리 떨어질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왜군의 기록을 보더라도 평양성전투에서 조선군15만 명군5만이 참전했고 함경도 전투에서 여진과조선연합군20만이 왜군을 포위했다라고 적고 있다. 이에 왜군장수만 겨우 목숨을 부지해서 도망왔다라고 적고 있다.  임진왜란당시의 일본군30만이 만일 유럽의 그 어떤나라나 명나라를 바로 침공했을때 막을 수 있는 나라가 있을까? 장담하건데 잘난체하는 프랑스 영국 독일 이탈리아 모두 전멸했을 것이다. 명나라역시 조선이 돕지 않는다면 땅의 절반이 먹혔을 것이고 굴욕적인 화친을 해야했을 것이다. 명나라는 일본의 해적떼수천명도 막지못해서 연안지방이 초토화된적도 있다.

태조이성계가 명나라를 침공하려 할때 주원장이 겁이나서 짓던 궁궐도 취소하고 잠을 못이루었다는 기록이 있다. 


3. 역사의식

적어도 임란이전에는 자주성이 강했다. 그러나 임란이후 귀족들은 귀고리도 하지 못했다 명에서 여진족의 풍습이라고  하지말라고 하니까~~~

명이 패하니 뜬금없이 소중화를 들고 나왔다. 우리가 문물의 중심이다 이런 것이다.~~~

그러나 세조때 기록을 보면 명이 타타르에 패하자 가소롭다라고 했다고 한다

세조의 초상화는 유일하게 통천관(황제의관)을 쓴 것이 있다

지금 남은 기록은 인조이후 새로 작성된 것이 아닌가 한다

청나라에 땅 다뺏기고 소국으로 전락한뒤 이를 은폐하기 위해 인조와 이후의 왕들이 조작에 가담한 것이 아닌가 한다

나도 그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광해군이 계속 왕으로 있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그가 임금으로 계속있었다면 오늘날 한반도와 동북3성의 대부분과 산둥은 계속 조선땅으로 남았을 테니까 그 넓은 영토와 2억이 넘는 인구로 강대국으로 남았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당시의 상황이 지금과 다르지 않다

왜군의 명나라 침공을 저지하려고 파병한 명나라와 공산주의의 확장을 저지하려고 파병한 미국

비록 명과 미국모두 그 이후 많은 불공정 처사로 비난을 받았지만

아직 우리나라는 미국을 좋아한다. 만일 미국의 중국의 경제적 공격을 받는다면 우리는 어느 편을 들까? 지금 중국이 우리의 제1의 경제파트너임을 감안한다면 미국편을 들면 우리 경제는 엄청난 타격을 받을게 뻔하다. 그럼 병자호란이전처럼 의리로 미국을 돕자는 쪽과 실리를 지켜 중립을 하자는 편으로 나눌 것이다

당시 지배층뿐 아니라 일반 민중도 의리를 지켜 명나라를 돕자는 쪽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당시의 지배층과 백성들의 잘못은 의리를 지킨 것이 아니라 우둔한 군주를 내세운 것이다. 이왕이면 광해군처럼 똑똑한 분을 임금으로 내세웠어야지 ....

 4. 지도자의 자질

 우리기록을 제아무리 뒤져봐도 흉년에 반찬 3가지 이하로 제한한 왕조는 조선이 유일하다. 궁녀수와 무덤의 규격에 있어서도 제일 검소하다. 정조때에는 백성의 민원을 해결하지 못하면 임금이 새벽4시에도 잠을 이루지 못했고 수시로 관리를  불러 묻고 해결했다고 한다.

고구려 백제 발해 요 금은 강성했지만 그 백성들의 삶이 과연 조선보다 낳았을까?

귀족들이 횡포는 이루 말할수 없이 심했다. 고리대금으로 백성을 괴롭히고 사람을 죽여도 처벌받지 않았다. 그러나 실록을 보면 양반이든 백성이든 최대한 공평하게 법집행을 한 것이 많다. 그 이전시기 귀족이 종을 죽여도 누가 처벌할까? 그러나 조선은 처벌기록이 많다.

이방원즉 정안대군 태종의 형인 회안대군 이방간이다. 형제이지만 두 가문은 크게 달랐다. 정안대군의 가문은 문을 숭상했고 회안대군의 가문은 무를 숭상했다. 회안대군의 자제는 신궁으로 태조이성계와 맞먹는다는 평가를 받았다. 또한 자존심도 강했다.

당시 왕자의 난에 대한 기록을 보면 조정대신의 거의 절반에 가까운 무관들이 회안대군을 지지했음을 알수 있다. 회안대군의 자제는 이미 장성하여 활약한 반면 정안대군의 자제는 아직 어렸기 때문이다. 만일 회안대군이 이겼다면 조선은 그 이전왕조와 비슷한 방식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한글창제도 없었을 것이고 세금체계도 구체적이지 못했을 것이다. 다만 자존심하나로 전쟁을 치루었을 것이다. 태종은 왕이 된뒤에 영락제가 여진땅을 요구하자 20만대군으로 먼저 침공할까 고민했다. 하륜같은 이는 왜군까지 불러서 같이 명나라를 침공하자라고 건의했다. 태종은 주저했다. 세종은 아예 대놓고 명나라를 치켜세웠고 세조는 야심이 있었으나 단종복위운동이 무서워 해외원정을 나가지 못했다. 그러나 회안대군이 왕이 되었다면 조선은 바로 전쟁이다.

최근에 방영하는 칼과꽃이라는 드라마를 보면 평화를 외치는 영류태왕과 자존심을 외치는 연개소문의 갈등을 볼수 있다.  중국쪽 자료를 찾아봤더니 연개소문이 당나라사신에게 불과 몇십년전까지 니네는 우리를 섬기던 나라였고 우리는 너희의 상국이었다라고 말하는 기록이 있었다.

자존심과 자긍심 때문에 연개소문은 당과 수차례 전쟁을 겪었고 물론 이겼지만 백성들은 수십만이 죽고 집을 잃었다. 과연 그 백성에게 연개소문은 좋은 지도자였을까?

나는 단언코 정안대군의 가문이 옳다고 본다. 지도자는 무릇 백성을 하늘같이 섬겨야 한다. 백성의 고통을 외면하는 지도자는 좋은 지도자가 아니다

백성을 위하는 마음에 우유부단해진 정안대군의 후손들은 급기야 숙종시기 청나라의 삼번의 난으로 최대의 기회를 맞았다. 오삼계와 강희제는 서로 조선에 10만대군을 빌려달라고 요청했고 지도층과 백성은 모두 이때 굴욕을 씻어야 한다고 했다. 조선군부는 10일만에 심양을 함락할 수 있다고 보고했지만 숙종은 사태를 지켜보자며 관망했다

시간은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최대의 기회를 그냥 날려버린 숙종은 이후 국경조약을 청과 맺어야 했다

많은 이들은 조선왕조를 비난한다. 자존심도 없고 굴욕의 역사라고 백성이 어려운 시기의 역사라고?

물론 권문세도가가 정권을 잡고 어린이 왕을 앉히고 국정을 휘어잡은 정조이후의 시기는 굴욕의 역사가 맞다. 그러나 그 이전시기의 왕들은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 발해 요 금의 어떤 왕조보다더 검소하고 백성을 위하는 왕조였다

지금 우리는 김춘추와 김유신에 대한 평가가 좋지 않다. 그러나 고려시대기록을 보면 그 두사람을 가장 치켜세운다. 왜냐하면 전쟁을 멈추고 백성을 돌본 시초를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광개토태왕이나 근초고황제같은 정복군주가 아니라 전쟁을 멈춘 군주를 제일의 군주로 본 것이다

훈족에 굴복한 유방은 중국에서 좋은 군주로 꼽힌다. 왜냐 백성을 위한 제도를 만들었으니 말이다. 진나라의 수많은 악법을 폐지하고 백성을 하늘로 여겼으니 비록 굴욕적인 군주이기는 하나 백성에게는 좋은 왕이었던 것이다. 훈족을 밀어내고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한무제를 백성들이 좋아할까?  중국쪽 드라마를 보니 평가가 좋지 않음을 알수 있었다.


잦은 전쟁으로 백성들은 수없이 죽고 세금에 고생했던 시절로 기억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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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하나로 시작되고 하나로 끝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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