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단고기> 유교가 환국桓國에서 유래됐다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환국은 인류 최초의 국가이자 시원 문명으로 한마디로 황금 시절이었습니다.그 시절 고대 문화권에서 이상적인 인간상은 광명한 인간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우주의 대大광명을 직접 체험하며 사는 것을 지향했고 이를 삶의 가치 가운데 가장 중시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을 다스리며 광명한 삶으로 이끌어가는 지도자를 ‘인仁’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통치자도 환인桓仁이라 했던 것입니다. 나중에 환국 문명에서 갈려나간 수메르 문명에서도 최고 지도자를 ‘인’이라고 했습니다.

 

유교는 그보다 훨씬 뒤에 공자가 창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공자는 본래 중국 은나라의 제후국인 송나라의 왕 미자의 후손입니다. 혈통을 따져 올라보면 그는 정통 동이족입니다. 그런데 이미 동서양에 두루 잘 알려진 것처럼 공자의 으뜸 가르침이 무엇입니까. 바로 인仁 사상입니다. 이것이 유교의 핵심입니다. 바로 이 인 사상이 동방의 환국-배달-조선에서 나온 것입니다.

공자는 자신의 생각과 학설에 대해 스스로 ‘술이부작述而不作’(『논어論語』 「술이述而」)이라 했습니다. 그 모든 것을 자신이 새로 지은 게 아니라 “옛 것(=일찍이 배달과 고대조선 동이족이 갖고 있던 예악 문화)을 좋아해서 그 문화의 정수를 정리한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공자 자신의 이 말에서 우리는 유교가 어디에서 나왔는지 충분히 유추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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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 고대 한국문명의 결정체, 홍산문명

9천 년 한민족사의 위대한 증언

안경전 종도사님의 『환단고기桓檀古記』 이야기

인류 정신사에서 볼 때 사실 근대사는 동방, 한반도에서 열렸습니다.

19세기 후반 조선에서 일어난 동학東學운동 나아가 동학이 못다 이룬 사명을 완성해가는 참 동학 운동이 그것입니다. 동학은 환국, 배달, 조선, 삼성 조의 황금 시절 문화를 이은 동북아 광명 사상의 전통에 맥이 닿아 있습니다.

환국에서 오늘의 대한민국까지, 한민족의 9천년 역사는 한국 고대 문명의 두 가지 핵심 단어라 할 신교 문화와 광명 사상으로 일관된 것입니다.

신교 사관, 대한 사관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은 <인간이야말로 천지 광명을 체험하고 천지의 뜻과 목적인 이상 세계를 성취하는 역사의 주체로 본다>는 점입니다. 대한 사관은 역사 해석을 넘어 인간에게 주어진 소명이 무엇인지까지 밝혀주는 시각이요 인식의 새로운 틀입니다.

인류가 이룩한 문명에는 반드시 우주관·신관·인간관·인생관 등 그 문명을 만든 주인공들의 정신문화가 있습니다. 그것들을 종합해서 시대를 바라보고 역사를 바라볼 때 비로소 우리는 역사를 바르게 인식하고 제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태곳적 황금시절인 환국의 전통에서 실로 소중했던 지혜들―우주관, 인간론, 신관, 인류문화의 구성 원리, 우주 수학의 체계, 우주 수학을 담은 천부경 81자의 참뜻 같은 것을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야 고대 환국의 역사 자체는 물론 나아가 환국과 서양 수메르 문명의 관계, 동서 문명의 총체적인 참모습을 알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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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학생들 日교사 턱 앞에 두 손 들이대고 "대한독립 만세"

안영배 논설위원 입력 2019.03.16. 03:00 수정 2019.03.16. 04:37

[2019 3·1운동 임정 100년, 2020 동아일보 창간 100년]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2부 <제44화> 서울 경성여고보

“(1919년 1월 21일 광무황제께서 붕어한 이후) 2개월간 우리는 여러 준비를 하였다. 학우의 주소를 조사하며, 재정을 구취(鳩聚)하며, 일인(日人)의 눈을 피해 비밀히 동지를 단속하였다. 혹 (불을) 때는 아궁이 앞에 널짝을 놓고 그 밑에 들어가 가만히 한마디 두 마디씩 연락을 하여 주기로 하였다가, 3월 1일 오전을 당하여 어린아이 큰사람 할 것 없이 ○○○○ 하나씩 둘씩 끌고 가서 오늘 할 일을 일러주었다. 그래도 천연스럽게 하오 1시가 될 때까지는 참고 공부하기로 하였다.

‘불의(不義)코 백년 살지 말고 의(義)코 하루 살아라’를 변소 벽에 기록하고 한 사람씩 가보게 한다. 하오 1시경에 독립선언서 1장이 들어왔기로 몰래 들여다보고 있을 때 탑골(탑동)공원에서 독립만세 소리가 천지를 울리다.”(상하이판 독립신문 1919년 10월 16일, ‘여학생 일기’)

이 글은 상하이(上海)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에 수록된 ‘여학생 일기’의 한 부분이다. ‘심원(心園)여사’란 필명으로 작성된 일기는 3·1운동을 기획하고 현장을 경험한 여학생의 육성을 고스란히 담고 있어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상경 KAIST 교수에 따르면 일기의 주인공은 당시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경성여고보·현 경기여중고교) 학생이던 김원경이다. 그는 3·1운동 직후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6차례에 걸쳐 독립신문에 일기를 연재했다.

○ 총독부가 관리하는 여학교

상하이판 독립신문 제16호(1919년 10월 2일자)에 실린 김원경의 ‘여학생 일기’.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제공상하이판 독립신문 제16호(1919년 10월 2일자)에 실린 김원경의 ‘여학생 일기’.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제공
경성여고보는 1908년 한국 최초로 설립된 관립 여학교인 한성고등여학교의 후신으로, 1910년대 당시 조선총독부가 직할하던 유일한 여자고등보통학교였다. 전국의 수재와 문벌 있는 가정의 자녀들이 찾는 명문 학교였다.

총독부는 경성여고보를 여성 황국신민화 교육의 전초기지로 삼고자 했다. 주로 외국인 선교사들이 설립해 운영하던 이화, 배화, 정신 등 당시 경성의 사립 여학교들과는 달리 총독부가 주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경성여고보 교사 대부분은 일본인들로 채워졌고 한국인 여학생들은 철저한 감시와 통제 아래 식민지 교육을 받았다. 총독부는 2세 양육을 맡는 여성들에게 신민화 교육을 하면 자연스럽게 전체 한국인의 신민화가 정착될 것이라고 판단했다.(박용옥, ‘한국여성항일운동사연구’)

민족운동 진영은 이런 일제의 의도를 간파하고 경성여고보를 일제의 여성 신민화 교육의 실패 사례로 만들기로 했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박희도(당시 YMCA 간사)가 주도적으로 나섰다. 그는 1917년부터 경성여고보생들의 비밀조직 결성을 지도했는데 3·1만세운동 당시 300여 명의 전교생 가운데 42명이나 이 조직에 가담할 정도로 규모가 컸다.(최은희, ‘조국을 찾기까지’)

저항의식을 기른 여학생들은 일본인 교사들과 맞서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일본을 ‘내지·內地’라고 표현하는 것은) 행랑것(한국)이 큰댁(일본)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고 설명하는 일본인 교사에게 여학생들은 “우리가 일본 사람의 행랑것들이에요?”라고 반박하기 일쑤였다. “일본 돈으로 조선이 산업화되었으니 고맙다고 절을 해야 한다”는 역사교사에게는 여학생들이 극도로 분노해 “피피피”라고 소리를 지르며 거세게 반발하기도 했다.(‘여학생 일기’)

경성여고보 출신 최정숙이 ‘소녀 결사대’라고 밝힌 경성여고보 비밀조직은 민족운동가들과 연락하며 3·1만세운동을 준비했다. 이 과정에서 본과생 최은희 김숙자 이양전과 사범과생 최정숙 강평국 고수선 등이 중심이 됐다.

특히 당시 25세의 ‘만학 처녀’로 학생들에게 “언니”로 불렸던 김숙자는 큰 지도력을 발휘했다. 이화학당과 영변의 숭덕학교에서 교편생활까지 경험한 김숙자는 일본 대학으로 유학하기 위해 경기여고보 3학년에 편입해 있었다. 그는 기숙사 복습실에서 한국 지도를 펼쳐놓고 ‘어린 동지’들에게 조국의 참모습을 일깨워줬고 취침시간에는 살며시 일어나 만세운동에 쓸 300여 장의 태극기를 제작했다.(김숙자 회고, 중앙일보 1976년 3월 1일)

그런데 3월 1일 새벽에 독립선언서 한 뭉치가 학교 담장을 넘어 운동장에 뿌려지는 일이 발생했다. 학교는 초비상이 걸렸다. 긴급 교직원회의가 열리고 학생들은 귀가를 봉쇄당한 채 학교에서 제공하는 빵으로 끼니를 때워야 했다. 기숙생들은 바깥출입이 금지됐다.

오후 1시에 탑골공원에 모이기로 한 약속을 지킬 수 없는 상황이 되자 학생들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이때 기숙생들 사이에서 “(교사들이 회의하는 틈을 타) 대문을 빠개자” 하는 고함이 터졌다. 검정 치마 밑으로 허리띠를 단단히 졸라맨 여학생들은 손도끼와 식칼, 돌멩이를 닥치는 대로 집어 들고 기숙사 후문을 부쉈다. 깨진 대문 조각들을 짓밟으며 학생들은 길거리로 쏟아져 나갔다. 죽음을 각오하고 나선 길이었기에 속옷에 주소 성명 학교 고향 부모 이름까지 써 붙인 학생(최정숙 회고)도 있었다.

오후 2시 경성여고보에서 남쪽으로 500여 m 떨어진 탑골공원에서는 이미 만세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여학생들은 탑골공원에서 선언식을 마치고 북상하는 군중에 합류해 경운동 천도교 중앙대교당을 거쳐 경성여고보 정문을 지나갔다. 교사들과 사환들은 학교 정문 앞에 나와 넋을 읽고 이 광경을 지켜볼 뿐이었다. 여학생들은 일인 교사들 턱 앞에 두 손을 바짝 들이대고 높은 소리로 “독립만세”를 통쾌하게 외쳤다.(최은희, ‘조국을 찾기까지’)

이날 시위로 경성여고보 전교생의 10%가량인 32명이 일본 경찰에 체포됐고 이 가운데 10여 명이 구금됐다. 하지만 경성여고보생들은 굴하지 않고 3월 5일 학생들이 주도하는 남대문역(서울역) 2차 시위에 다시 참가했다. 경성여고보 기숙생 전원(70여 명)은 이날 새벽 사감의 눈을 피해 기숙사를 빠져나가 시위에 참여했다. 이때 경성여고보생들은 ‘일편단심’을 의미하는 빨간 머리띠를 수천 개 만들어 경성고보 남학생들을 통해 각 학교에 전달해 사용하도록 했다.

두 차례에 걸친 경성여고보생 시위는 당시 장안에 큰 파문과 충격을 던졌다. 특히 일제 당국은 3월 1일 1차 시위에 관립인 경성여고보 전교생이 만세운동에 참가한 사실에 경악했다. 여성 신민화 교육이 실패했음을 보여준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 독립운동가로 변신한 여학생들

3·1운동에 놀란 조선총독부는 3월 10일 경성지역에 임시휴교령을 내린다. 추가로 있을 학생운동을 막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데 기여했다. 학생들은 귀향한 뒤 각 지방에서 펼쳐진 만세운동을 주도했고 열렬한 독립운동가로 변신했기 때문이다.

경성여고보생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김숙자는 휴교령에 고향인 평안북도 영변으로 내려간 뒤 1919년 8월 여성 비밀 독립운동 조직인 ‘대한애국부인회’ 평북조직책으로 활약하다 1921년 5월 일경에 붙잡힌다. 그의 활약상은 수원대 박환 교수가 최근 찾아낸 ‘매일신보’ 1921년 6월 24일자 기사 ‘여자 정치범 검거, 독립운동의 거괴(巨魁) 김숙자’에서 확인할 수 있다. 기사에 따르면 김숙자는 독립운동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체포됐다.

‘수원의 유관순’으로 불렸던 이선경은 수원 최초의 자생적 학생 결사조직인 ‘혈복단’(이후 ‘구국민단’)에 가입해 독립운동에 투신한다. 1920년 8월 일경에 체포된 이선경은 8개월 후 석방됐으나 고문의 후유증으로 풀려난 지 9일 만인 1921년 4월 21일 19세의 꽃다운 나이에 순국했다. 그는 “만일 석방된다면 다시 이 운동을 벌일 생각인가”라는 일경의 질문에 “그렇다. 석방돼도 다시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우겠다”며 신념을 굽히지 않다가 죽음을 부르는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신문기자로 활약하던 최은희는 1927년 한국 최초의 전국적인 여성운동 조직인 ‘근우회’에 참여해 민족운동을 이끌었다. 제주 출신의 여자 3인방 최정숙 강평국 고수선 역시 군자금 모집 등 항일운동, 문맹퇴치 교육 등에 헌신했다. 최정숙과 고수선은 훗날 독립유공자로 선정됐지만 강평국은 아직까지 서훈을 받지 못했다.

박환 교수는 “김숙자 강평국 등 과거 여성들은 자신의 공을 드러내지 않는 경향이 컸다”며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더 찾아내고 기리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 기개 높은 민족의식 서로 공감했나… 부부인연 맺은 민족운동가들 많아 ▼

3·1운동 후 낙향 교단에 선 김숙자, 독립운동가 언론인 장도빈과 결혼

‘여학생 일기’ 주인공 김원경은 상하이 임정 참여 최창식과 혼인

1919년 3·1운동 당시 경성여고보 교사. 현 서울노인복지센터(종로구 경운동 90)가 자리한 곳으로 당시 학교 정문은 운현궁을 마주 보고 있었다. 사진 출처 ‘경기여고100년사’1919년 3·1운동 당시 경성여고보 교사. 현 서울노인복지센터(종로구 경운동 90)가 자리한 곳으로 당시 학교 정문은 운현궁을 마주 보고 있었다. 사진 출처 ‘경기여고100년사’
3·1운동은 여학생들과 남성 민족운동가들을 부부로 맺어주기도 했다. 남녀 구별이 엄격했던 당시 3·1운동 전개 과정에서 기개 높은 민족의식을 드러낸 여학생들이 독립 투쟁에 뛰어들었던 남성 운동가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섰기 때문이다.

‘재원 집합소’로 이름을 날리던 경성여고보 학생 김숙자(1892∼1979), 김원경(1898∼1981) 등이 대표적이다.

김숙자 지사는 3·1운동 후 평안북도 영변으로 귀향해 교사 생활을 하던 중 1920년 7월 언론인이자 국사학자인 장도빈(건국훈장 독립장)과 결혼했다. 김 지사의 아들인 장치혁 전 고합 회장(87)은 “당시 노총각인 아버지(33세)와 노처녀인 어머니(28세)가 결혼의 인연을 맺은 것은 항일 독립운동이라는 공통분모가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김 지사는 독립운동가 집안 출신의 재원이었다. 그의 부친 김준찬은 광복군 사건으로 투옥 생활을 한 독립운동가였고(동아일보 1925년 11월 12일), 그의 남동생 김응원은 임시정부의 국내 조직인 ‘연통제’의 책임자로 활약하며 조선총독부 대관(大官)을 암살하려다가 체포됐다

(동아일보 1922년 3월 3일).

‘여학생 일기’의 주인공인 김원경은 1919년 4월 ‘조선독립애국부인회’ 및 ‘혈성단’ 대표로 중국 상하이에 파견을 갔다가 독립운동가 최창식(건국훈장 독립장)을 만나 결혼했다. 오성학교 교사 출신인 최창식은 3·1운동 당시 서울에서 학생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벌인 뒤 상하이로 망명해 임시정부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는 상하이판 독립신문 등을 발행하는 인쇄소를 운영하다가 김원경과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숙명여학교 출신 박자혜 지사(1895∼1943)도 3·1운동을 인연으로 결혼까지 했다.

조선총독부의원 산부인과 간호사로 일하던 박 지사는 당시 일본 군경에 무자비하게 진압당한 학생들을 치료하면서 일본을 위해 일한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이후 간호사들로 구성된 ‘간우회’를 조직해 일제에 항거하다가 일경에 체포되기도 했던 박 지사는 중국으로 망명해 단재 신채호(건국훈장 대통령장)를 만나 결혼까지 한다. 박 지사와 단재는 1920년 우당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의 소개로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안영배 논설위원 oj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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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빠진 시마네현 통계서 발굴.."日고유영토론 반박 자료"

한철호 동국대 교수 "시마네현, 1906년 이후 독도 편입 명확해져"

 

 

시마네현통계서 1877년판의 위도 부분. 붉은색 선 안에 북단이 '36 35'이라고 기재돼 있다. 독도는 북위 37 14분이다. 시마네현이 독도를 일본 영토로 인식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사료다. [한철호 교수 제공]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독도가 일본의 고유영토였다는 주장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내용을 담은 일본 시마네(島根)현 공식 통계 문서가 발굴됐다.

 

이 자료를 통해 일본 정부가 1905 2월 각의 결정으로 "죽도(竹島·독도의 일본명)를 영유한 의사를 재확인했다"고 공포한 뒤 독도를 부랴부랴 자국 영토로 편입하려 했다는 사실이 더욱 명확하게 드러났다.

 

한철호 동국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20일 동북아역사재단 독도연구소와 영남대가 공동 개최한 독도 학술회의에서 1877년 이후 발행된 '시마네현통계서'(島根縣統計書)를 분석한 결과를 공개했다.

 

한 교수는 통계서의 분석 기점을 1877년으로 잡은 데 대해 그해 일본 메이지(明治) 정부의 최고 행정기관인 태정관(太政官)이 울릉도와 독도는 일본과 관계가 없으니 이 사실을 관리에게 주지시키라는 지령을 내렸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태정관지령은 일본의 독도 고유영토론을 반박하는 중요한 자료지만, 일본은 이 자료를 외면하고 있다.

 

시마네현통계서 1879년판에 실린 지도. 위쪽에 오키 제도는 있지만 독도는 어디에도 없다. [한철호 교수 제공]


한 교수가 찾아낸 시마네현통계서는 당시 현의 전반적인 실태를 객관적으로 기록한 자료다. 통계서에는 관할구역의 경도와 위도를 비롯해 연혁, 도서(島嶼), 지세(地勢), 지도 등이 포함됐다.

 

그는 무엇보다 시마네현이 동서남북의 극단 지점을 표시한 경위도에 주목했다. 1877년 통계서에는 시마네현의 남단이 북위 34 30, 북단이 36 35분으로 기록됐다. 북단의 위도는 독도에서 남동쪽으로 157.5㎞에 있는 오키(隱岐) 제도의 위치 정보와 일치한다.

 

이에 대해 한 교수는 "독도는 북위 37 14분으로, 시마네현의 영토에서 제외돼 있다" "태령관지령이 정확하게 반영된 결과라고 생각된다"고 강조했다.

 

이어 "1877년 시마네현통계서를 보면 경위도 외의 다른 항목과 지도에도 독도가 모두 빠져 있다" "이러한 통계서 편찬 방향은 1905년까지 이어졌다"고 말했다.

 


시마네현통계서 1904년판. 위쪽에 오키 제도(왼쪽)와 독도 지도가 나란히 삽입됐다. [한철호 교수 제공]


시마네현통계서에서 독도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1906 9월 발행된 1904년판이다. 이 지도에는 오키 제도와 독도가 나란히 삽입됐다. 독도는 오키 제도의 10배 축척을 적용해 두 섬이 엇비슷한 크기로 보인다.

 

한 교수는 "1905 2월 각의 결정 이후 독도가 일본 영토에 편입됐다는 사실을 부각하려 한 것 같다" "지도에만 독도가 들어갔을 뿐, 경위도 정보 등에서는 여전히 독도를 제외하는 오류를 범했다"고 설명했다.

 

시마네현통계서에서 지도가 아닌 글에 독도 편입 사실이 기재된 것은 1919년판이 최초다. 이 문서의 연도 부문 1905년 칸에 "2 22일 죽도를 가()"이라고 명시한 것이다.

 


시마네현통계서 1877년판. [한철호 교수 제공]  

이 통계서들은 당시 일본 정부가 각 현의 자료를 취합해 국가 전체 통계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사료로 평가된다. 실제로 시마네현통계서는 태정관과 내무성, 육군성 등에 전달돼 관련 정보가 그대로 반영됐다.

 

한 교수는 "시마네현은 각의 결정 전까지 독도가 자신들의 영토라고 인식하지 않다가 뒤늦게 야욕을 드러냈다" "1905년 이전까지는 독도가 일본 영토가 아니라는 사실이 일본 정부 차원에서도 널리 인지되고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 교수는 이어 "시마네현통계서는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는 모순이 있다는 점을 밝히고, 한국의 독도 고유영토론 논리는 강화하는 근거 자료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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